韓服(한복)

Published September 4, 2010 by 담임목사 in 목사님 칼럼

며칠째 비가 내려 을씨년스럽다. 마음이 여기엔가 잡혀있어 빠져 나오지 못하고 깊은 웅덩이로 더 빠져간다. 누이의 訃音(부음)에 한 걸음에 달려가 마지막을 함께 못한 죄책감이 나를 더욱 우울하게 한다. 아무리 천국이 좋다지만 生과死 이별의 아픔은 만나자고 약속한 날이 성큼 다가오자 내 마음을 망설이게 하며 발걸음을 주춤하게 한다.

‘오월에 온다며 잘 하고 있을게 그 때 만나, 김 목사’ 그 마지막 누이의 음성이 아직 魂이 살아 생명력 있는 것 같은데,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 靈前 앞에서의 만남은 인간의 言語로는 표현할 수없는 아픔이요, 아쉬움이요, 괴로움이었다. 그곳에 생각과 호흡이 멈추어 서서 고뇌하는 나에게 어느 날 꿈에 셋째 누나가 찾아왔다.

검정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걱정스런 모습으로 아무 말 없이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이네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그토록 애절하던 어머니도 보인 일이 없는데 웬일일까 걱정이 앞서고 궁금증 더해만 간다. 마지막 遺言(유언)으로 남긴 한복을 풀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집사람에게 “여보, 나 죽으면 저 한복 입혀 보내줘” 그리고 “모든 형식을 삼가고 그냥 불에 태워 고향에 뿌려 줘“

집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죽은 사람이 뭘 알아 내가 알아서 할께” 한다. 생각해 보니 그 누이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나에게 새 옷을 입혀 주었고, 또 마지막 새 옷까지 입게 하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영 거시기하다. 늘 혼자라는 불안함, 쓸쓸함, 명절이라도 되면 뼈 속까지 파고드는 외로움, 그래서 바지 호주머니에 한국 연락처랑 전화번호를 써서 넣고 다니며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잘 있나 확인해보는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냐만

언제가 서울에서 만나 내가 추워 보였던지 따뜻한 털옷 사준다며 남대문시장에 가니 촌사람으로 보았던지 헌옷을 새 옷이라고 우기며 겁주는 주인장이 무서워 내가 “누나, 이모부에게 연락해” 라는 소리를 듣고 한 발 물러서며 이모부가 뭐하냐고 묻기에 바로 저기서 장사를 한다고 대답하고 빠져나와 ‘누나. 나 안 추워 그냥 갈게’ 하는 나에게 용돈 손에 쥐어주며 “동진아, 굶지 말고 다녀라” 며 눈시울 붉히던 그때 그 모습에 멈추어 서 버린 기억을 가슴에 담고 30여년을 보내버린 이 먼 땅으로의 이별,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어두움에서 빠져 나오자면 아직은 시간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느 날, 내가 운동 삼아 걷은 오솔길을 울창한 푸른 숲이 나뭇잎으로 감싸 감추었던 아름다운 姿態(자태)를 내려놓고 듬성듬성 속내를 드러내고, 땅에 묻혀 忍苦(인고)의 세월을 성충으로 보내야 할 매미는 맴맴 구슬프게 울어대고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낙엽은 입추를 재촉하는 길목에 어린 사슴 한 마디가 가는 길을 멈추어 세우고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는데 그 모습 얼마나 가련하던지 이내 지우지 못하고 뒤로한 내 모습이 희미해지자 숲속으로 달아나 버린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무슨 일이 있나, 급하게 집에 들어서니, 둘째 누님이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전갈이 왔다. 그리고 한참동안 행여, 다시 살아났다는 전갈이 오지는 않나 현실을 떠나 망상 속에 머물러 섰는데 葬禮(장례)를 마치고 한 숨의 흙으로 보냈다는 전갈이다.

그 속을 빠져나와 日常(일상)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그리고 사도 바울의 고백 “만일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선교(宣敎)는 헛된 일이며, 또한 여러분의 신앙도 헛된 것이다”는 말에 다시 마음을 다 잡고 새벽을 깨운다. 돌아올 추석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을 작정이다. 그리고 누이의 따뜻한 魂을 느끼는 외롭지 않은 명절을 보내고자 한다.

이 글을 시작하고 여섯 달이나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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