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By 담임목사 on October 13, 2019

본문: 예레미야33장1-3절
제목: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본문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啓示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부르짖으라.’고 명령하시면서 부르짖으면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여 준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갇혀 있었습니다.

‘부르짖다’는 자동사로서 ‘격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소리 높여 크게 떠들다.’ 예를 들면 만세를 부르다. 그리고 ‘어떤 주장이나 의견을 열심히 말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본문에 ‘부르짖다’는 기도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기도를 하느냐와 그 기도를 듣고 응답하는 대상은 어떤 분이냐는 것입니다.

큰 都市에 가면 인생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생명의 전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화를 걸면 전문가가 나와 이런저런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합니다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는 같습니다. 일종의 봉사활동인데 이 활동의 본보기는 바로 하나님의 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聖書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시50:15)라는 약속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부르라’는 ‘전화를 걸다’와 같은 말로서 고민하고 고통당할 때 하나님께 전화를 걸면 언제든지 즉시 가장 요긴한 도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시121:4)

그리고 ‘하나님의 전화’는 누구든지 어떤 문제든지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무료로 통화가 가능한데,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기도의 대상이신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으로 알고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살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일하시는 하나님

분문2절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입니다. 즉 하나님은 일을 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5장17절에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살후3:10)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믿는 성도들의 일은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분문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성취하시는 여호와’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일을 만들고, 일을 하시고, 일을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가 창조입니다. 聖書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됩니다. 한 마디로 성서는 “하나님께서 일하셨다.”로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聖經은 하나님께서 우주 森羅萬象 그리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노아 혼자서 방주를 만들었냐는 것입니다. 아마 수많은 전문 인력과 엄청난 자금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문 인력을 동원한 일도 없고 자금을 사용하지도 않으시고 오직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둘째는 섭리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 부르던 童謠가운데 홍난파 선생이 지은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쓰다 버린 쪽박인가요.’라는 것이 있습니다. 달이 신비로운 존재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인간이 달에 착륙하자 신비로움이 산산조각이 낫습니다.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떠 있고 지구촌에는 60억이 넘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9개의 행성이 돌고 있습니다. 목성은 태양으로부터 약7억8천만km 떨어져 있어 매 12년마다 태양을 한 바퀴 돕니다. 인류는 혹시 충돌하지 않을까 노심초사 연구를 해왔지만 우주창조 이후 지금까지 9개의 행성이 우주공간에서 충돌 없이 돌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때문입니다.

20c초 독일의 신학자 ‘Karl Barth’는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신 정통주의 신학을 주장하면서 ‘교회 교의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의 장을 열었습니다. Barth는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분별하고 실천하게 하는 데 있다고 보았고, 또한 교회는 신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학의 지혜에 따라 교회를 이끌 책임이 있고, 신학자에게는 교회에 대해 생각하고, 교회에 생명을 불어넣는 책임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섭리는 교회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반면 同時代의 스위스의 신학자 ‘Emil Bruner’는 자연계시를 주장하면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창조된 모든 것에서 인격적으로 가능하다고 보아 선교신학을 주장했습니다. 즉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셋째는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세상을 구원하셨고, 믿는 우리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구원은 일종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것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에 의해 붙들리고 사로잡히고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드리는 것’은 행동이라기보다는 반응입니다.

따라서 모든 권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今世紀 동성애자에게 구원이 있는가? 라는 질문이 교회와 신학에 던져지고 있습니다. 그들도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잘 못 대답하면 큰 도전에 부딪치게 됩니다. ‘부드’는 옥스퍼드 대학의 연설에서 ‘인간 최선의 사업은 구령이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의 목적이었고, 사회와 국가에 공헌하는 것이고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는 일이고 구령자의 영혼에 은총이 임하기 때문이고 한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으면 그 주위에 천국이 도래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죽게 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자신의 피를 흘려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넷째는 심판입니다.

舊約聖書는 이스라엘의 民族史입니다. 범죄하고 심판받고 회개하고 구원받고를 반복해 온 역사입니다. 한마디로 죄를 짓고 매를 맞았습니다. 심하게 매를 맞으면 그들은 잘못했다고 회개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회개를 들으시고 용서해 주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살만하면 또 다시 죄를 짓고 매 맞고 회개하고 용서받아 구원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나라가 망하는 날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한 신경외과 의사는 ‘우리의 인식 속으로 들어온 것은 무엇이든 상관없이 상세하게 기록되고 머릿속에 저장되어 언제라도 밖으로 재생될 수 있다’고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될 때 자신의 삶의 기록이 있는 그대로 재생되어 제시될 때 무슨 수로 그것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기록들은 결코 지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천하를 공의 심판하실 날을 작정해 놓으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순간순간의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2. 응답하시는 하나님

본문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상대방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간절히 힘을 다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기도가 있습니다. 불교도 기도가 있고, 회교도 기도가 있고, 무당종교도 기도가 있습니다만, 그들의 기도에는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예레미야에게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크고 비밀한 일은 유다의 파멸과 회복, 그리고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환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를 계획하시는 분이시며, 그 계획하신 일을 성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의 명예를 위하여 기도에 응답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얼음공장에서 일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톱밥이 쌓여 있는 곳에서 값비싼 시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료와 함께 2시간 이상이나 시계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을 때 어떤 어린 소년이 그의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꼬마야, 그 시계 어디서 찾았니?” “예, 제가 톱밥 위에 앉아 있는데 시계 소리가 ‘째깍 째깍’하고 들렸어요.”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정신없이 요란하게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조용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트레비스’는 ‘하나님은 조용한 가운데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함소리도 들으십니다. 우리의 손놀림이나 아우성을 보고 들으십니다.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응답하리라 내게 부르짖어라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르짖어 기도합시다. 믿고 기도합시다. 풍성한 하나님의 응답을 믿고 기도합시다. 지금 당장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부르짖어 기도하여 응답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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