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문을 열어라

By 담임목사 on October 28, 2018

본문: 사도행전16장6-15절

제목: 마음의 문을 열어라

牧會를 하면서 가장 힘들고 고약한 성도, 그리고 세상에서 못된 사람은 마음이 꼬부라진 사람입니다. 어릴 때 우리 동내에는 미국 선교사, 장로, 목사 가족들이 모여 사는 좀 특별한 마을이었습니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다섯 이상씩 두어 세대수에 비해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때문에 동내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사건이 발생을 합니다. 선교사 아이들이 사고를 치면 이런저런 이유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자기 아이를 그 자리에서 채벌합니다. 그런데 목사나 장로 아이들이 사고를 치면 부모들이 잘잘못을 따집니다. 결론은 우리 아이 잘못이 아니라 남의 아이가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목사 아이와 장로아이가 사고를 치면 이유 없이 무조건 목사 아이가 잘못한 것입니다. 그 중에 마음이 꼬부라진 장로는 그냥 넘어가지 않고 꼭 목사 사택으로 찾아와 한 마디 합니다. “목사 자녀가 그러면 쓰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는 훈련을 잘 받았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목사 자녀는 무조건 잘못한 것입니다.

때문에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에 억울함과 분함으로 마음에 상처가 심하게 남아있어 무슨 일에든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피해만 본다는 피해의식에 사리분별이 잘 안되어 인간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런 현상은 특별히 교회 안에서 성도와의 관계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합니다.

첫째,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잘 하는데 상대가 잘못한다는 인식이 자신을 늘 피해망상에 사로잡히게 하고, 둘째, 자신이 늘 옳다는 교만함에 다른 성도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저는 교회 사택에서 태어나 교회와 신학교에서 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영아부부터 교회 안에 모든 일을 거의 다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성도와의 관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leadership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내가 다 안다, 성도, 너희들은 잘 모른다. 그리고 뭔가 문제점을 지적하면 어릴 때 마음의 상처가 사랑의 충고를 정죄로 받아드리게 됩니다.

그 결과는 대화의 단절을 초래했고, 급한 성격에 욱하기 십상이고 초년 목회시절에 우왕좌왕 너무 힘들고 어려워 목회를 그만 둘 생각을 수없이 했었습니다. 금식기도를 해보고 결정할 요량으로 기도원에 들어가 지하기도 굴에서 성경을 읽다가 요한복음3장에 니고데모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당시 니고데모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전도를 시작했을 때, 밤에 예수님을 찾아 간 사람이며 유대인의 관원이요, 바리새인이며 공회의 의원이었습니다. 신라시대로 말하면 진골이고 요즈음으로 말하면 sky이 출신에 박사이며 교수 출신 국회의원쯤 되는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부족할 것이 없는 그가 무엇인가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허전함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가와 천국과 영생의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 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대답에 니고데모가 다시 묻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오늘 우리의 문제는 바로 이 질문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의문이 풀리지 않아 분함과 억울함에 싸여 마음이 꼬부라져 앞도 안 보이고 이웃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오직 자신만이 보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두 번째 대답에 귀를 기울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다시 말하면 거듭난다는 ‘Born again’ 이것은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인데, 물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성령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은 것은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성령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받은 자와 준 자 외에는 알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기도원 지하기도 굴에서 이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이 제 마음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방언으로 성경말씀을 읽게 하여 성령이 임함을 확인 시켜 주시고 스스로 자신을 살피고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대단한 초능력이 생긴 것도 아니고 엄청난 지식이 솟아 난 것도 아니고 인품이 고상해진 것도 아니고 다만 성령을 나를 주장하게 하셨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피해의식에 남의 탓만 하던 마음의 상처와 의식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 저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 내가 이렇게 할 때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염려와 의심이 사라진 것입니다. 더 이상 꼬부라진 마음이 아니라 이 상처투성이인 마음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분문에 두아디아 성의 자주 장사였던 루디아의 개종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 중에 가장 주목을 끄는 말씀이 14절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케 하셨다.”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본문 가운데 주님이 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셨는가를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 마음을 열렸는가를 살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루디아는 꾸준한 열심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으로 이 사실을 알 수 있느냐 하면 루디아는 안식일에 문밖 강가에 나가 앉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위기에 처한 가장 큰 이유는 안식일에 문밖 강가에 나가 앉아 있는 자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핑계야 있겠지만 우리 믿는 성도들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강가에 나가는 것입니다. 즉 주일성수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루디아는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하는 성문 밖 강가에까지 기도하기 위하여 매 안식일 마다 찾아 나갔던 것입니다.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루디아는 해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엄청 크고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고 성실함을 요구하십니다.

미국에 와서 지금까지 변함없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살기 힘들다. 불황이다’라는 말입니다. job를 구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말도 안통하고 신체조건도 기준이하이고 그래서 직장에 가면 온갖 수모를 다 당하며 견뎌야 했습니다. 그 가운데 주말에 일할 수 있다고 하면 오라는 데가 많은데 주일성수를 할 수 없습니다.

장사도 주일 삼사일 매상이 주일 하루 매상과 거의 같습니다. 때문에 성수주일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유혹이 따라왔습니다. 더욱이 공부할 때는 더 심한 유혹과 시험을 이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후에 그 결과를 보면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시절 교회에서 만날 수 있던 사람들은 지금도 교회에 만날 수 있지만 그 시절에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직도 거리에 만날 수 있습니다.

2. 루디아는 하나님 제일 주의자였습니다.

본문14절에 보면 “두아디아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고 했습니다. 당시 두아디아는 소아시아 지방에 있었고, 빌립보는 구라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루디아는 장사를 하는 사람으로 객지에 나가 있었던 것입니다. 객지에 나가서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Kansas에 다녀왔습니다. 한 오년 전에 다녀온 일이 있는데 그때는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우리 아이가 교회를 안 가요 기도해 주세요.’였습니다. 그런데 그곳뿐만이 아니라 이민 가정의 모든 부모들이 꼭 같은 말을 합니다. 90% 이상의 이민 가정의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면 교회 안 나갑니다.

이번에 교회에 가보니 노인만 있던 교회에 젊은이가 많이 있고 부흥을 했습니다. 그렇게도 말해도 교회 안 나오더니 학교 졸업하고 직장생활이나 사업을 시작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나서 교회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혼자 나갔는데 돌아올 때는 자연전도를 해서 최하 세넷 명 이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부모들보다 수입도 높아 교회재정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님세대는 잔소리로 일괄하며 아이들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안절부절 불안한 세월을 보냈지요. 큰 도시 어느 큰 이민교회에서 날이 갈수록 노인들만 남고 젊은이들이 없어서 앞날이 걱정인데 어느 권사님이 권사회의를 소집합니다.

늙어가는 교회의 현상들은 우리 모두가 주님을 높이는 신앙심이 부족한 탓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자녀들이 교회에 나와 부모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을 하자고 제안을 합니다. 광고를 하고 몇 주가 지나자 부모를 만나려 젊은이가 한두 명씩 예배당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부흥회를 하는데 야간에 주차장 안내를 젊은이들이 나와 해달라는 광고를 합니다. 이를 지휘하던 장로님이 그들이 서로 하는 대화 내용을 듣고 그리고 얼마나 성심을 다하는 지 은혜를 받고 당회에 그들만을 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고 모든 예산을 집행하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2세 목회자를 청빙하여 그들만을 위한 목회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모들보다 더 열정이고 뜨겁고 더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6개월 만에 천 명이 넘은 부흥을 하게 됩니다. 부모보다 더 열린 마음과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고 교회와 지역사회 그리고 세계를 향하여 더 많은 일들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그들의 부모가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과 끝임 없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는 것과 더욱 중요한 사실은 억지로라도 대학에 가지전까지 교회를 데리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의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장대를 바라보면 살리라”

마음의 문을 여는 데에는 주님의 음성을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요한계시록3장20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나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들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음성을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일 날 부모님을 안 따라 가면 불이익을 당할까 강압에 못 이겨 억지로 주일학교에 출석을 하였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그들은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뭘 얼마나 들어 알겠어. 할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께서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이 옮겨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여는 데는 의심의 빗장을 벗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12장14절에 보면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다 하니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계집아이가 힘써 큰소리로 참말이라고 하자 온 성도들은 “그러면 그의 천사가 온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히자 예루살렘 교회 온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철야로 기도하면서도 의심하면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설마, 이 밤에 어떻게 옥문을 열고나올 수 있겠어’ 오늘 우리 마음에도 의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 우리 앞에 서 계신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없고,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여 꼬부라져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자 하면 완악한 자물통을 풀어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 여러 여자들이 마음 문을 열지 못하고 그대로 흩어진 것은, 완악한 자물통과 고집의 자물통 그리고 교만의 자물통이 그대로 매어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디아는 “그는 바울의 말을 청종한지라”고 했고 또한 “만일 나를 주를 믿는 자로 알거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루디아는 의심이 빗장과 완악한 자물통과 교만의 자물통을 다 내려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루디아는 전폭적으로 믿고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마음을 크게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루디아를 유럽에서 첫 열매가 되었으며, 온 권속을 주 앞으로 이끌어 내었으며, 바울의 전도를 크게 도울 수 있었으며 빌립보 교회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믿되 꾸준히 믿으십시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 제밀 주의자로 살아가면서 말씀을 청종하는 자가 되십시다. 아름답지 못한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거나, 의심하거나,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자물통들은 다 벗겨 놓고 전심으로 마음 문을 크게 열고 루디아처럼 전도자를 돕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얻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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