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날을 바라보자

By 담임목사 on August 4, 2019

본문: 창세기13장14-18절
제목: 앞날을 바라보자

미국의 경제학자 ‘John Kenneth Galbraith’ 1977년에 발표한 著書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경제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불확실성을 논하는 것은 비단 경제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북한으로부터 위협 그리고 주변국 역학관계로 인한 안보문제, 국제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역 분쟁 등,

‘시계제로’의 시대라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五里霧中의 암흑과 같다는 말이 현실이 아닌 가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차가지로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습니다. 전혀 가름할 수 없는 질병과 죽음 그리고 실패 등, 오리무중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고 예측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 5분 후에 일을 예측할 수 있으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個人的으로, 社會的으로, 民族的으로 오리무중에 빠진 風前燈火와 같은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설교를 준비하면서 깊이 묵상해보았습니다. 정치가도 전문가도 아닌 목회자로서 생각과 지식에 한계가 있어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습니다.

기도 중에 새벽설교를 준비하다가 말씀 가운데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라는 말씀에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말에 ‘고집’이라는 말이 있는데, ‘자기 의견을 굳게 내세워 버팀. 또는 그러한 성질.’이라고 국어사전에 정의해 놓았습니다.

이 말은 사무엘이 자기 의견대로 제사를 집례 한 사울 왕에게 한 말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사울 왕의 말에도 一理가 있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원칙을 무시한 고집스런 행동에 대한 책망이지요. 여기서 순종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한 마디로 ‘자기 의견을 굳게 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울 왕의 실수는 자기 의견을 굳게 내세워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모두 다 ‘쇠에 경 읽기다’는 말과 같이 귀를 기울려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의견과 다르면 이네 귀를 닫아 버리기 일쑤지요. 이것이 이 시대를 오리무중의 암흑으로 덮어 버린 원인이 아닌 가 생각합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내가 호흡하는 이 땅의 대통령과 나의 조국 대통령이 영웅주의에 빠져 ‘자기 의견을 굳게 내세워 버팀’으로 앞날을 보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을 유신정권과 함께 보내고 유신정권이 수명을 다할 쯤 고향을 떠나 이억 萬里 미국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나는 유신정권과 더불어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지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일본제품을 선호하는 편이 아닌 가해서 반성해 봅니다. 어느 해인가 회의 차 한국을 방문했다가 추억이 담긴 한 시골 마을을 찾아 가보았습니다. 추억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습니다.

思春期 시절, 시골동네 사는 동무의 집을 가는 길에 큰 길 가에 서서 먼발치로 보이는 고래 같은 기와집이 자기네 집이라고 합니다. 속으로 ‘이 촌놈이 부자 집 아들이구나.’ 생각하면서 5분이며 가게구나. 했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이 돌아 돌아갑니다. 저녁을 먹고 잠자리 들어 그 친구에서 물었습니다.

‘아니, 왜 5분이면 올 길을 근 한 시간이나 돌아서 오냐’고, 친구의 대답을 아직까지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 땅은 박 씨네 땅인데 3대째 원수로 지내며 그 땅을 지날 수 없어 돌아 다린다.’ 최 씨와 박 씨가 합의를 하지 않아 그 마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좋은 말로 자연 그대로입니다.

조상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굳게 닫아 버린 고집스러운 행동으로 兩家가 입어를 경제적 손실을 조상 할아버지가 헤아렸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동내 가운데로 길이 나고 골짜기까지 차가 들어가고 전기가 들어오고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하게 한 지혜가 요구되는 시대가 아닌 가 생각합니다.

본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자손이 호흡하며 농사짓고 아들딸 낳고 살아가야 할 땅을 선택하는 순간에 東西南北을 바라보며 축복의 근원이 되는 땅을 선택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어떻게 하면 아브라함과 같이 멀리 내다보고 축복의 근원이 되는 땅을 선택할 수 있을까를 살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높이 올라가야 합니다.

今世紀 들어 考古學의 발달로 노아의 방주나 바벨탑 터의 흔적이 발굴되고 있어 문명이 발달할수록 창조론이 진화론을 넘어 서 새로운 신학이 요구됩니다. 노아 홍수 이후 인류는 물에 대한 공포심에 늘 불안해 해왔습니다.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늘을 향해 탑을 쌓기 시작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에 의해 탑은 무너지고 인류는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이후 인류는 전쟁의 역사로 점철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바로 순종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들 소견대로 고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높은 곳에 올라간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높은 수준까지 올라가서 자신의 인생을 내다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영적으로 높은 경지에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 결과를 본문16절에 “내가 네 자손을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시대 믿음의 사람, 성도들이 두렵고 불안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편한 데로 판단의 기준을 정하고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으로 당장 좋은 대로 선택의 기준을 삼고 신령한 방향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불확실한 오리무중 암흑 속을 해매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11장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암흑 같은 오리무중의 미래가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신령한 믿음의 눈을 가지고 영적인 높은 곳에 올라가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 축원 드립니다.

2. 생각의 폭을 넓어야 합니다.

‘우물 안에 개구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물 안에만 살던 개구리는 하늘의 넓음이나 바다의 깊음을 우물만큼의 넓이와 깊이로만 이해한다는 뜻으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존재가 상식적인 문제나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일 때 주로 쓰이는 말입니다.

잠언23장7절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은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전라도 사투리 가운데 ‘거시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애매모호한 말입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야, 거시기 좀 가지고 오라’고 하면 어김없이 시어머니가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옵니다. 더욱 심한 것은 ‘야, 아가! 내가 거시기한데 거시기 해라’하는데, 더 웃기는 것은 며느리가 ‘예, 어머니’하고는 무엇인가 한다는 것입니다.

오랜 경험으로 서로의 마음과 생각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좀처럼 오해나 다툼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냥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마음과 생각으로 통하는 사람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는데 바로 아브라함이 그런 믿음의 사람입니다.

통하지 않으니까 두렵고 불안한 나머지 남을 모함하고 상처주고 자포자기해서 매사에 부정적인 언행을 일삼으며 사탄의 노예처럼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에 사로잡혀 남을 살리고 축복해주며 창조적인 삶을 살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14절 이하에 보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것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니라. 하셨습니다.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것은 생각의 폭을 넓이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생각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룻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다보면 그 인생은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눈으로 높이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생각의 폭을 넓혀 가시기를 바랍니다.

3. 자유로워야 합니다.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고희를 눈앞에 둔 저도 가큼 소년시절 기억 속에 갇혀 자유롭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더욱 우리를 심각하게 하는 것은 죄의식 속이나 어떤 경험 속에 머물러 있을 때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를 구속하면 멀리 내다 볼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항상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인 압박가운데 갇혀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되고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춤거리고 망설이게 됩니다. 자유롭기 위해 발버둥 쳐보지만 그 압박감에 멀리 내다볼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12장1-2절에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대탈출(Exodus)’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백 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모세의 인도아래 대탈출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지자 그들은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을 떠올립니다. 애굽의 고기 냄비를 그리워하여 모세를 원망하고 노예로의 복귀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노예근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기 냄비와 자유, 빵과 해방, 그 가치의 차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크지만 노예근성이 깊게 박혀 있으면 가치의 혼돈이 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과거에 매어 있으면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미국의 유니언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히틀러 정권과 맞서기 위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 다섯 살이었습니다. 그는 독일로 돌아가면서 “진정한 평안은 하나님의 공의대로 결단했을 때 온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는 12년 후 독재정권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강제수용소에 있었을 때 자유에 대해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자가의 욕망을 정화하는 훈련, 정의를 바로 실천하는 행동, 무력과 고독안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축복의 가나안 땅은 멀고도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 넓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가까운 곳에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멀고 먼 곳에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주도하는 사람,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멀리 내다보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보지 않고 생명을 보았습니다. 죄악을 보지 않고 구원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시간부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항상 주안에서 자유 함을 얻고 멀리 내다보며 앞날을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고 시공간을 초월해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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