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믿읍시다

By 담임목사 on February 4, 2018

본문: 데살로니가전서1장1-10절

제목: 잘 믿읍시다.

사도바울이 처음 쓴 書信,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데살로니가교회에 성도들에게 보내 편지입니다. 사도바울 일행이 이곳에서 복음 전하자 헬라인들이 귀부인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잘 믿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성내를 교란시킨다고 핍박을 해 견딜 수 없어서 야밤에 도망을 갔습니다.

베뢰와 빌립보를 거처 고린도까지 도망을 처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 박해를 당하는 것은 아닌지, 초조하고 안타까워 디모데를 보내면서, 가서 살펴보고 오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에 다녀온 디모데가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고를 합니다.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은 예수를 너무나 잘 믿고 있습니다. 교회가 감사가 넘치고 뜨겁게 찬양하고, 晝夜로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뜨겁게 예수를 잘 믿어요.’ 이 보고를 받은 사도바울이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두 편의 편지를 써서 보내 서신이 데살로니가전후서입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뿐만이 아니라 사방팔방에 하나님을 향한 너희의 뜨거운 믿음의 소문이 두루두루 펴져 우리는 기쁘기 한량이 없다며 본문3절에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칭찬을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감사하고 기쁜 일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때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생각하며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참으로 보람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어떤 일을 했는가를 살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확고한 믿음으로 일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신뢰하는 마음이 믿음인데 로마서10장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성경 말씀을 모르면 올바로 믿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잘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4장20절에 씨 뿌리는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뿌리었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고,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믿음을 키워 나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으세요.’라고 복음을 전하면 간혹 조롱어린 모습으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한번 보여주면 믿지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쓰신 가시관을 보지 못했고, 몸에 상처를 만져 보지 못했고, 무덤 문을 막았던 바위도 눈으로 보지 못했고, 예수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가 살아계심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빈 무덤을 확인해 보지도 못했지만,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예수그리스도가 함께 계심을 의심하지 않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마음의 눈으로 성경 말씀을 읽어 예수님을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뢰하고 일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2장14-6절에 사도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라고 했고, 156절에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리고 16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일 있으리오.”라고 했고 17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니고 생각으로 끝나는 것은 더군다나 아니고 믿음은 그 믿음만큼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밤에 그저 무릎을 끊고 기도드리는 것만은 아니라. 믿음이란 그저 어둠을 지나서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은 아니라.

믿음이란 있을 수 있는 영광을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란 죄로 가득한 기쁨을 그저 미워하는 것만이 아니라, 믿음은 과감한 노력이요 장렬한 모험이며 어떤 상황 아래서도 봉사할 수 있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것을 잘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들을 생각할 때 기쁨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행동하고 실천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 사랑했습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보고 듣는 대로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은 받아 할 수 있다는 말이고, 즉 사랑은 배워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야 할 수 있는 본능에 가까운 감정의 표현입니다. 신약성서는 사랑을 네 가지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사랑은 네 가지가 있는데, 에로스, 성적인 사랑, 스트로게, 가족혈족에 대한 자연적인사랑, 필리아, 친구에 대한 우정의 사랑, 그리고 아가페가 있는데 성경은 사랑을 아가페를 쓰고 있습니다. 에로스가 자연적 내지 가치 추구 적이라면, 아가페는 자기를 부정하고 기꺼이 자기를 남에게 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사랑은 고린도전서13장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프랑스의 小說家 생텍쥐페리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다’ 고, 우리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기에 충분한 명언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마주바라 보는 것으로만 여겼습니다.

마주바라 본다는 것은 마음과 행동이 서로 같아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男女가, 父母와 子息이 친구와 친구가 서로 마음을 같이 하기 위하여 수많은 갈등을 일으키며 상처를 입히고 상처를 받으며 그것을 사랑이라는 것으로 포장하며 자기 합리화를 일삼아 온 것이 우리들이 아닌 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자기의 생각은 한 발 양보하고 상대방의 의견은 이해하면서 공통의 목적을 향해 호흡을 맞추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모든 갈등과 분쟁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서로 의심을 더디 하고, 신뢰는 빨리하고, 정죄는 더디 하고 의롭게 여기기를 빨리하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참는 데 빨리하며, 폭로하기를 더디 하고, 은폐하기는 빨리하며, 견책하기는 더디 하고, 용서하기는 빨리하고, 불평하기는 더디 하고, 감사하기는 빨리하고, 요구하기를 더디 하고, 주는 데는 빨리하는 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셨습니다.

3. 소망으로 인내했습니다.

素望은 ‘바라다, 기대하다, 멀리 내다 보다, 향하여 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굳게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근거해서 소망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 그들은 환난이나 박해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운명의 신’이 있어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면 당신은 무슨 소원을 말하겠는가? 하자 어떤 중년부부는 서로 의논하더니 죽기 전에 세계 일주를 할 수 여비를 주었으면 하자. 당장 부부에게 충분한 여비가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네 그 돈이 사랑하는 아들이 교통사고 죽은 배상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부는 돈을 돌려주면서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는 두 번째 소원을 애원합니다. 이 애원이 이루어져 죽은 아들이 돌아오자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세 번째 소원을 말합니다. 앞서 두 번의 소원을 취소하고 처음 살던 대로 살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영국의 단편소설의 줄거리 인데 그 유명한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이야기이지요. 재미있으면서도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意味深長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적 같은 소원을 바라 소원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앞에 이야기는 기적 같은 소망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는 교훈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6절에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세상이 주는 그 어떤 시련과 슬픔도 능히 참아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 중에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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