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과 토기장이

By 담임목사 on January 14, 2018

본문: 예레미야18장1-11절

제목: 진흙과 토기장이

어느 날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부르셔서,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이에 예레미야가 토기장이 집에 내려가서 보니까 토기장이가 녹로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녹로는 우리말로 ‘물레’라고 하는데, 물레질을 하다가 어떤 것은 그냥 던져 깨뜨립니다. 이것을 ‘파상’이라고 합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왜 이것을 보게 하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토기장이 일하는 것을 보아라. 너도 저렇게 할 수 있겠느냐? 진흙이 토기장이 손에 있는 것처럼 너희가 다 내 손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창조의 권리를 계시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백성들을 멸하기도 하시며 재앙을 거두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고자 하시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심판으로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후에도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실 수 있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자 하신 말씀입니다.

舊約聖書 이사야서 29장16절에 보면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여기서 ‘패리’는 ‘도리나 이치에 어그러짐’이라는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정리를 하면 너희가 계속해서 도리나 이치에 어그러진 행동을 하면 토기장이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은 그릇을 ‘파상’ 즉 깨뜨려 버리듯 너희들을 깨뜨려 버리겠다는 경고이자 돌아오면 용서해 주시겠다는 은혜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영어로 ‘We’는 인칭대명사로 ‘말하는 이가 자기나 자기 무리를 포함한 여러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국어사전에 정의하고 있습니다. ‘We’ 우리는 반드시 ‘You and Me’ ‘너와 나’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독처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않아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말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둘만 있을 때는 아주 행복하고 평화롭고 즐겁고 기뻤습니다. 이 두 사이에 다른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그 결과 비교라는 단어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비교’는 ‘두 개 이상의 사물을 견주어봄’이라는 뜻인데, 그 다른 하나가 사탄인데 사탄이 하와와 하나님을 비교해 보도록 유혹을 했습니다.

聖經에 나오는 女人 중에 ‘사라와 하갈’ 그리고 자매지간인 ‘레아와 라헬’이 있습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여종으로 아브라함이 애굽에 있을 때 바로에게서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라와 하갈은 신분으로나 육안으로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매지간인 레아와 라헬은 신분상으로는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육안으로는 구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동생인 라헬이 언니 레아보다 훨씬 아름다워서입니다. 이 때문에 가장 피해를 본 인물이 야곱이지요. 어여쁜 라헬을 얻기 위해 못생긴 레아를 아내로 맞이해야 했고 14년간 머슴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레아와 라헬 사이의 이야기를 성경에 근거 각색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두 자매는 아무 문제없이 사이좋게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 라반이 장에 다녀오면서 자매에게 거울을 하나씩 사다가 주었습니다. 예쁘게 생긴 라헬은 거울을 보며 스스로 감탄을 합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아름다워’ 그런데 레아가 거울을 보니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 얼굴이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너무 못생겨서.

당장 그 다음 날 아침부터 집안의 평화가 깨졌습니다. 라헬만 보면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는 레아가 짜증을 부리고 반찬 타박에 시시골골 라헬에게 시비를 걸고 온갖 불평과 불만.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구실만 있으면 아버지 라반을 찾아가 라헬 욕을 하고, 설상가상 야곱의 등장으로 갈수록 심각해져 집안 꼴이 말이 아닙니다.

야곱이 동생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머슴살이를 시작하자 레아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라반을 찾아갑니다. ‘아버지 아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는 쌍꺼풀도 없고 얼굴은 동글라고 입술은 돼지 입술에 피부는 닭살 같고 저기에 짜리몽당까지 하고 멀쑥한 게 호박처럼 나았냐고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도 나를 미워하나보다고.

바로 거울이라는 사탄이 라반의 집에 들어와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소리가 들립니다. ‘아! 레아야, 네가 감히 누구에게 원망하느냐? 사람을 내가 만들었는데 어찌 나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하게 하나는 천하게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없겠느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거울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남에 손에 떡을 크게 보여줍니까? 어느 목회자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평’이라는 책을 은퇴한 후에 50년 동안 성도들이 찾아와 다른 사람에 대하여 한 불평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것은 아내가 남편에 대하여 한 불평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사연은 ‘우리 남편이 밖에서 남에게는 잘 하는데 나에게 잘 못하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꼴찌 성적표를 들고 온 아이를 나무라자 ‘왜 돌대가리로 태어나게 했느냐며’ 부모를 원망하고, 옆집 철수는 일등 했는데 너는 뭐가 부족해서 그러냐며 비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주 만물을 ‘있으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는 흙으로 손수 지으셨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어 성령으로 만드셨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손길과 생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내가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쓰시고자 지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이 무엇입니까? 우주만물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일입니다.

구약성서 창세기1장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눈으로, 거울로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닙니다. 음식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해서 이것저것 마구 먹어서는 안 됩니다. 못 먹을 것이 있고, 눈으로 봐서는 안 될 것도 있습니다. 가까이 가서는 안 될 곳이 있고, 만져서는 안 될 것도 있습니다. 이것쯤이야! 설마,

하와가 보는 것쯤이야 하다가 만져보는 것쯤이야 하다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바로 이것을 분별하고 관리하고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우리를 만드신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릇된 거울, 즉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왜 살아야 하는지 조차 모르며 살아가게 합니다.

사랑을 잃어버리고, 세상 향락에 빠져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눈에 보이는 땅에 속한 것이나 욕심내고 선악과나 따먹을 생각을 하니까 인생이 허무하고 앞에 캄캄한 것입니다. 하와가 분별할 수 있었으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탄은 그 생각을 매우 주도면밀하게 이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고, 가지도 말아야 하고, 보지도 말아야 하고 먹지도 말아야 하고 비교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파상해 버립니다. 다시 말하면 깨어버린다는 말입니다. 토기장이신 하나님께서 그릇인 우리를 마음에 들지 않아 깨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을 예수님께서 ‘밖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8:12)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한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1987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물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꽃 같은 나이의 젊은이, 많은 사람을 잡아다 가둔 공안부검사 등,

이 공안부 부장검사의 양심 있는 행동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영화를 평하는 자리에서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이건 아니지’라는 양심의 소리와 ‘스스로 자신과 화해했다.’ 스스로의 거울로 자신을 바라보며 양심을 행동에 옮겨 새 시대를 열고, 후에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고 화해했다는 말입니다.

암울한 시대이었습니다. 잡아 가두는 자, 물고문으로 죽은 자, 최루탄에 맞아 죽은 자, 양심고백을 한 의사, 물고문을 가한 자, 죽음을 무릅쓰고 편지를 전한 자와 공표한 자, 民主主義를 완성해 가는데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그들을 높이 평가하고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질 수 이었던 것입니다.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파상당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거울에 비추는 스스로의 모습을 감추려는 자, 눈에 보이는 것을 움켜지어는 자들입니다. 왜 파상을 당했습니까? 패리함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즉, 도리나 이치에 어그러짐이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본문6절에 보면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과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하지 않으니 깨뜨리고 그 조각을 다시 모아서 다른 그릇으로 재창조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던지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파상 당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돈 때문에, 간혹은 건강 때문에, 혹은 명예 때문에 깨어지고 납작하게 깔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만들고자 하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깨어지는 것이 오히려 큰 축복을 주시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그릇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보기 좋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그릇 속에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하루의 시작을 새벽 제단에서 시작하십시오. 집에 가서 다른 일 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읽고, 좋은 찬송을 틀어놓고 좋은 생각을 하십시오. 삶이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재창조 받으시고 하나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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