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나

By 담임목사 on March 25, 2018

문: 마태복음21장9절

제목: 호산나

‘Star’라는 英語 單語가 있습니다. 演藝人이나 運動選手 중 아주 뛰어나게 잘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Cleveland Cavaliers의 ‘Lebron James’라는 Star Player가 있습니다. 유연성, 탄력, 속도, 힘, 기술 등 어디 나무랄 때 없는 선수입니다. 그를 선두로 NBA에서 우승하고 돌아오자 십만이 넘은 인파가 모여들어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승을 예상하는 전문가는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아침마다 운동을 하며 Sport channel을 통해 경기를 보면 그를 보고 열광하는 관중이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경기력이 예전 같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너무 혼자 다 하려고 하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 가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순절의 막바지로 접어들며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수많은 군중들이 환영하며 외친 소리입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호산나’는 ‘구원해 주시옵소서.’라는 의미를 가진 單語입니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고 위대한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기대치가 높아지고 실망 또한 크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본문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자국을 남겼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에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두 가지 특징을 지적할 수 있는데 첫째가 많은 무리가 따랐다는 것입니다.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男女老少, 貧富貴賤에 상관없이 동내가 떠들썩하게 많은 사람들이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앞뒤에서 따랐음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을 하시자 그 십자가 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홀로 계셨습니다. 이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아무 생각도 없고 목적도 없이 그저 군중심리에 이끌리어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뜻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고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오늘 날도 믿는 성도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며 교회에 나오기는 하는데 구경꾼처럼 들락 달락 하는 생명이 없는, 利害關係가 달라지면 언제든지 돌아설 수 있는 목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헌신이나 희생을 기대할 수 없지요.

우리 믿는 성도들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여 이웃과 세상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분명하여야 하고 믿음의 목적과 의식 분명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 마지막 종려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따르는 사람, 떡과 물고기를 먹고 배부르기 위하여 따르는 사람, 가정이나 자녀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따르는 사람, 세상이 바뀌면 한 자리 하려고 따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이 이루어지면 등을 돌리고 떠나기 마련이지요.

한 마디로 신앙의 뿌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결코 이래서는 안 됩니다. 풀무에서 단련한 정금이나 은과 같이 찌꺼기 없어야 합니다. 때가 묻은 믿음, 세속적은 믿음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모두 그런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무리지만 예수님의 뜻을 행하려고 따르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이를 행하고자 따르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참 그리스도인들인데, 문제는 이런 믿음의 사람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철도공사장에서 일꾼들이 터널을 뚫기 위하여 굴을 파다가 흙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밖으로 나가는 입구가 완전히 막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되었습니다. 이때 밖에서 일하고 있던 동료들이 사고가 난 것을 알고 즉시 흙더미를 파 들어가기 시작을 했습니다.

하루 종일 파내고 터널 속으로 들어가 놀랬습니다. 그 안에 갇혀 일꾼들이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즉 묵묵히 자기들의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일을 중단한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들은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도 땅을 파는 천공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밖에 동료들이 자신들을 구출하리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믿는 우리에게 비록 가장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라 할지라도 그 고난에서 벗어나는 길을 마련하려고 무리한 노력을 기울이지 말고 자신을 위한 탈출구를 만드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맡긴 채 바로 앞에 놓여 있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 곡괭이와 삽을 부지런하게 놀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도움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믿는 성도들은 더 힘찬 발걸음으로 자신의 길을 갈수 있는 것입니다. Lebron James 이야기를 더 하면 요즈음 들어 많은 관중이 열광하는 Play를 합니다. 딱 한 가지가 달라졌는데 그것은 Assist를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왜 혼자 하려고 했을까요? 자신이 제일이라는 교만한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 교만한 마음이 팀 동료를 믿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 교만한 마음에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스스로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Italy의 신학자 Augustinus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해는 신앙의 대가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믿으려는 바를 이해하려 들지 말고, 당신이 이해하고 싶은 바를 믿으라.’ 많은 이들을 이렇게 말한다. ‘보이는 것을 믿는다.’고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가르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려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호산나를 외치며 소리 질러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 오십니다. 우리 인생의 왕좌에 앉으셔서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시고자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 인생의 왕좌를 예수님께 온전히 내어 드리고, 그 분의 지배 아래 우리의 모든 의지를 굴복시키고 그분의 오심을 소리 질러 환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구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밖에는 구원이 없으며 그 누구도 우리를 구원할 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죄와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우리 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 편에서 보면 구원은 일종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것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에 의해 붙들리고 사로잡히고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행동이라기보다는 반응입니다. 따라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님을 소리 높여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물리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세 가지 결론에 도달하였다. 첫째, 구원이란 과학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 둘째, 도덕적인 부흥이 있어야 한다는 것, 셋째는 생명을 주는 종교 없이는 어떠한 도덕적인 부흥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고,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랴”고 탄식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대제는 ‘나는 러시아 일국을 다스릴 주는 알지만 내 마음은 다스리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술, 담배, 마약을 끊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데 하물며 교만, 비겁, 탐욕, 음란, 거짓, 시기, 도적, 몰인정, 불신앙 등을 사람이 혼자 힘으로 이길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죄와 허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겠습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인 것들을 맨 앞에 놓고 그것을 맨 뒤로 돌리지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 이루어지는 새로운 도덕관이요 영적인 회심이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선에로의 신중한 전향입니다.

그리스도는 종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마태복음20장28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세속적인 지배자들과는 달리 섬기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셔서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Servant’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본이 되셨습니다. 베드로전서5장5절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허리를 동이라’는 영어로 ‘be clothed’ ‘옷 입으라’는 의미인데 이 말은 앞치마를 매는 것처럼 하인이 제복을 입는다는 특별한 의미에서 ‘맨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일할 태세를 갖추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종려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소리 질러 호산나를 외치고 앞치마를 동어 매는 믿음의 결단이 함께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사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앞치마는 다른 사람에 대한 겸손한 봉사를 상징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호산나를 외치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 중 어떤 모습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까? 종려주일에 호산나를 외치며 자기를 성찰하고 부끄러움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힘쓰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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