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말씀이

By 담임목사 on January 1, 2010

본문: 요한복음1장1-5절
제목: 태초에 말씀이

하늘의 소망으로 가슴을 펴 새해를 밝히고 첫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올 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곁에 계신 분들과 인사합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는 복의 근원이 됩시다.’ 바로 어제 같은데 해는 저물고 새 날이 왔습니다. 톨스토이는 “우리는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도 ‘인생은 나그네 길’ 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잡아 세우려 해도 마냥 지나치는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모습니다. 인생이란  시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따라 흐르는 것입니다. 시간 따라 흘러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옛 습관과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때문에 소망이 없습니다. 두려움과 원망 그리고 불평과 비난뿐입니다. 저는 오늘 새해 첫 날 예배를 드리면서 옛 습관과 생각을 버리고 희망을 가슴에 품은 은혜가 같이 하시기 원합니다.

금년 우리교회 표어가 “성령으로 새롭게‘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말씀으로 새롭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돌아보면 새로워져야 할 것들이 많이 있지만 저는 금년 한 해 동안 교회적으로 한 가지만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바로 예배가 영적으로 새로워지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히11:4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훌륭해도 믿음이 없이 드리는 예배는 내용이 없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가인의 인격이 그의 제물과 함께 열납 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둘째, 예배드리는 자세입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한 자세는 첫째, 정한 예배시간에 빠지지 않고 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거리관계나 교통수단의 문제들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둘째, 준비하고 드려야 합니다. 마음 태도 복장 헌금 등 미리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셋째, 바른 자세로 정성껏 드려야 합니다. 넷째 예배는 생활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끝나면 바로이어 삶의 현장으로 나가 생활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시작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로 시작하면서 그 말씀이 누구를 말하며 그 말씀이 하신 일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태초에 계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창조 전부터 계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그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생명이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본문 1장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고 2절에서는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시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연말에 서제를 정리하면서 결혼사진을 보았습니다. 변해도 너무 변해서 저도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나만 변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변했습니다. 사람도 변하고, 산천도 변하고, 인심도 변하고, 역사도 변하고, 문화도 변하고, 풍습도 변합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노벨경제학 수상자 루카스는 한국을 “기적의 창출”(Making a miracle)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서양 선진국이 몇 백 년 동안 이룬 것을 50년 만에 해냈습니다. 실로 엄청난 변화입니다. 어람 전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동남아 사람들이 거의 비슷비슷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변해서 금방 표가 납니다. 서울에 가면 여기가 진짜 서울인가? 의심스럽습니다. 사람인심과 풍습은 놀랍게 변했습니다.

가장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다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도 가고, 시대도 가고, 역사도 가고, 때가 되면 나도 갑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멸망하지 않은 존재가 되려면 예수를 믿고 의지하며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생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프란시스 선교회에서 만든 전도지에는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는 길이니 나를 따르면 안전하리라, 진리니 믿을 수 있을 것이며, 나는 생명이니 풍성한 삶을 얻을 것이라, 나는 빛이니 일생을 지켜 줄 것이며, 나는 목자니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리라, 나는 전능자니 모든 창조물들을 다스릴 것이며, 너를 지은 자니 변치 않고 사랑하리라, 나는 친구니 너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지키고 순종하면 영원한 행복을 누리리라.

2. 만물 안에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3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창조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말씀이신 예수가 창조자이셨다는 사실과 창세기에서 말하는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이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말씀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새롭게 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작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라는 책에서 신에 대한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한 기독교인 청년이 존경하던 장로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체가 썩어서 심한 악취가 났습니다. 이것을 본 청년은 큰 쇼크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청년은 외칩니다. “나는 신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신이 창조한 세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 청년은 한 여자를 알게 됩니다. 이 여자는 천민 계층에 속하는 여성이었으나 청년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 줍니다.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몹시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청년의 생각은 차차 변합니다.

그는 대지에 엎드려 입을 맞추며 눈물로 대지를 적시며 외칩니다. “나는 대지를 사랑한다. 영구히 사랑한다. 나는 누구든 용서하리라. 그리고 세계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빌리라.” 그의 인생관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한 줌의 흙조차도 사랑스러워지며 그 어떤 죄인도 용서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드리는 거룩한 사명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가난했지만 자기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 곧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호흡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무한한 기쁨과 소망과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3장5절에 보면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州境(주경)가들은 물을 물세례로 보기도 하고 말씀으로 보기도 합니다. Calvin은 물을 성령이라고 했고, Ironside는 물을 성경말씀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내가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듣다가 감격해서 눈물을 흐리며 회개하고, 말씀을 읽다가 울컥해서 눈물 흐리며 회개하면 새 사람이 되고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성도가 빨래비누 공장 주인의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신자이고 또 한 사람은 신자가 아니어서 만나기만 하면 서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어느 날 빨래비누 공장 사장이 성도인 친구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자네가 믿는 복음이 그렇게도 귀하고 또 열심히 전하는데, 왜 세상은 점점 죄악이 늘어나고 부조리가 날로 심하여 가는지 설명 좀 하게.” 교회가 그렇게도 많은데 세상은 왜 악해지는지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자네는 열심히 빨래비누를 많이 만드는데 왜 거리에는 아직도 더러운 것이 많으며 더러운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랬더니 사장은 “그거야 그들이 빨래비누를 사다가 쓰지 않기 때문 아니겠나?”라고 너무나 당연한 듯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거야 복음은 분명히 복음이지만 사람들이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자네도 복음을 믿지 않으니까 그 모양이지.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데 어떻게 변화가 있겠는가?”라고 재치 있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어 그 사랑을 계시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을 인정하고 시인합니다. 내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숙한 인격의 사람은 즉, 고집스럽고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좁은 채널 안에서 사랑을 비판하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나의 소원. 나의 욕망. 나의 이상대로 되어야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손 바닥만한 것을 딱 내어놓고 이대로 되어야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거듭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금년 한 해, 창조하시는 말씀으로 우리 모두 새사람이 됩시다.

3. 빛 되신 말씀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생명이 본질이라면 빛은 사역을 의미합니다. 생명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살다가 죽어 없어지는 생명이고 하나는 영원히 죽지 않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며 참 생명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참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은 예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빛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 예수 안에 길이 있고, 예수 안에 고침이 있습니다.

어두움을 몰아내는 데 과연 얼마만큼의 빛이 필요할까요? 아주 작은 빛입니다. 그것은 등화관제를 할 때 여실히 드러납니다. 온 동네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을 때 어느 집에서 TV를 켰다고 합시다. 그 빛은 어김없이 밖으로 새어나와 어두움의 적막을 깨고 맙니다. 또한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조그만 손전등 하나가 아주 훌륭한 길 안내자가 되어줍니다.

성도 여러분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영적인 암흑이 존재하는 곳은 없습니까? 어두움은 아주 작은 빛으로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눈이 달빛에서 반사해서 빛을 발하듯이, 예수님의 빛을 반사해서 내는 그 빛을 우리에게서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조용히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삶으로써 그 빛의 역할을 해내실 수 있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내쫓고 밝혀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심령과 우울하고 답답한 내 영혼을 밝혀 줍니다. 일 잘 안되고, 길이 잘 안 보이고, 그래서 영혼이 답답하고 앞길이 캄캄한 사람은 빛 되신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119:105)라고 했습니다. 그 빛이 오늘 내 심령을 비추고, 내 가정을 비추고, 교회를 비추고, 사회를 비춰야 합니다.

대철인(大哲人) 소크라테스는 제자들과 함께 나무 밑을 거닐면서 대화를 주고받는 방법으로 그의 유명한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하루는 그가 갑자기 대낮에 촛불을 들고 앞장서 갔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제자들이 “선생님 웬일이십니까?” 하고 황급히 물었습니다.  “너희 눈에는 사람이 보이느냐? 나에게는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촛불을 들고 무엇인가 부지런히 찾는 듯 두리번거리면서 걸어가는 노 스승의 뒷모습을 본 제자들은 그제야 그가 혼탁한 아테네 사회에서 길을 밝혀 줄 양심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얼굴을 붉혔다고 합니다. 세상에 빛 되신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할 때 혼탁한 세상에 빛을 비추게 됩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빛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빛으로 만물 위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율법과 예언으로 계시되어 진리의 빛이 되셨습니다. 이 진리의 빛은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은혜의 빛이 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빛이 없으면 온 세상은 어두워지고 생물도 성장을 멈추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이 없으면 우리 심령은 어두워지고 생명은 말라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태초에 계셨던 말씀은 영원히 계시면서 우리를 재창조하시고 생명의 빛으로 우리들을 비춰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금년 한 해도 창조의 말씀으로 우리의 앞길을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육신도 비추어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사업도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그 빛 앞에 살고 그 빛과 함께 살아갑시다. 말씀을 읽읍시다. 말씀에 귀 기울여 들읍시다. 그리고 그 말씀을 겸손하게 실천하며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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